익산 미륵사지

2025. 2. 24. 18:44여행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호국 사찰[1]이다. 2009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능산리 고분군정림사지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1998년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이 시작되었고 21년만인 2019년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역사=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고,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이 와유록에 있다. 그러나, 해체하여 구조를 살펴본 결과 1층부분에서 발생한 구조의 변화로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3]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창건 배경 =미륵사 창건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성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를 하고 국호는 남부여로 개칭을 하였다. 양과 신라, 왜에 외교를 확대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은 후 고구려의 땅인 도살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으며 551년에 신라와 같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 6군의 권리를 되찾는다. 신라는 죽령이북 고현이남 한강 상류 유역 10군의 땅과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인하여 553년에 한강의 하류지역을 뺏기고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였다. 554년에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관산성에서 대패를 한 후  성왕 은 전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제는 국가의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 후 120년 동안 나제 동맹이 깨지고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무왕의 즉위 전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다. 서동은 백제왕의 허락을 받은 후 진평왕과의 우호관계를 위해서 금을 지불하고 힘들게 결혼하였다. 이러한 결혼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 하에서 신라의 침입을 늦추고 신라와 함께 대처할 목적이었다. 선화공주는 무왕과 결혼을 하고 미륵사를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무왕은 미륵사를 지음으로써 국가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백제 말기, 대중들의 종교적인 기원과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면서 부처의 힘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고자 미륵사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특히, 미륵사와 같은 큰 사찰의 건설이 가능했었던 원인은 백제 공장들의 발달한 건축 기술과 토목 공사의 수행 능력 덕분이었다.
창건설화= 미륵사는 무왕 때 지어졌던 백제의 가장 큰 사찰 중 하나이다. 미륵사의 전례를 살펴보면 무왕이 지명법사를 만나려고 부인과 같이 사자사에 가는 도중, 용화산의 밑에 있는 연못가에 가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 나타났다. 무왕은 수레를 멈춘 후 경하를 하면서 큰절하였다. 부인은 이 연못에 커다란 절을 세우기 원하였고 무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무왕은 지명법사 찾아가서 못을 메우는 방법을 물었고, 지명법사는 하룻밤동안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서 그곳을 평지로 만들었다. 그후 이 평지에 미륵삼존을 모셨으며 불전, 회랑 그리고 탑을 각각의 세 곳에 세웠다. 그 후 이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기로 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중장기 학술조사연구 ‘미륵사지 재발견’ 사업의 일환으로 특별전 ‘미륵사지 출토 치미 -제작, 폐기, 복원의 기록-’을 선보입니다. 예부터 치미는 격이 높은 건축물의 지붕 용마루 양 끝을 장식하는 기와로, 치문鴟吻, 취두鷲頭, 반우反羽, 루미樓尾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한반도에서는 4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고구려 안악1호 무덤 벽화 등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치미가 확인됩니다. 7세기에 조성된 미륵사지에도 다양한 형태와 문양을 담은 치미가 출토되었습니다. 비록 완전한 모양이 아닌 편으로 존재하지만, 이 유물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역사의 흔적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익산, 무왕武王(재위 600~641)이 창건한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 미륵사,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찰의 지붕을 장엄했던 치미의 다종다양함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석탑 발굴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다.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봉안 기록에 따르면 실제 미륵사는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지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 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며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5]

은제 사리병의 발굴로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신앙에 따라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존 설에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후비였을 가능성과 미륵사의 동원, 서원, 중원이 순차적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의 성과를 존중하여 미륵사의 창건에 대한 기원을 수정해야하며 창건 당시 삼원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는 의견이 크다.[6]

 

익산 미륵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호국 사찰[1]이다. 2009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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